본능적 투쟁 욕망의 알레고리
박찬용의 핏불 조각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욕망으로서 공격성과 투쟁본능 그리고 동종(同種)에 대한 보존과 거부의 모순적 심리구조를 개량종 투견인 ‘핏불'의 형상을 통해 드러내는 작업을 시도해 온 박찬용의 네 번째 개인전. 그의 개 연작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예술작품에 묻어있는 억제된 힘과 진지한 비판정신이 현대 지식사회가 내세우는 주요 담론들과 끈이 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담아내는 조소작업의 개성적 조형방식과 재료사용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박찬용은 개를 만든다. 개는 그의 작업을 위한 중심소재이며 개의 속성을 관찰하고 그 형상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개의 조각가로 불리울만 하다. 박찬용은 개의 조각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받아드리고 있다. 그러나 사자나 악어와 같은 맹수 조각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앙트완-루이 바리에처럼 그를 동물조각의 장르에 속해있는 작가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박찬용의 개 조각에는 자연물로서 동물의 형상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개의 형상을 통해 온갖 오해와 이해의 담론을 생산하는 의미들이 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들어낸 개는 알레고리를 위한 도구라는 점에서 더 이상 개가 아니다.
박찬용의 조각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우선 그가 소재로 다루고 있는 개는 혈통 유전학 적으로 매우 특이한 종자이다. <아메리칸 핏불 테리어>라 명명된 이 종은 싸움개로서 투쟁을 목적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개량되어진 동물로 알려져 있다. 사냥이나 가축 몰이 혹은 맹인을 인도하는 다른 종류의 개들과는 달리 상대방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싸우는 종자인 것이다. 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우성인자 조합체인 핏불은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잔혹한 욕망의 대리자로 취급될 가능성을 지닌다. 하나의 예로 핏불은 인간의 투쟁 본능에 대한 욕망을 대신하여 치루는 도구로 개량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박찬용의 개는 여러모로 싸우는 인간을 닮아있다. 저부조로 조각된 핏불의 얼굴을 보면 링 위에서 상대방의 귀를 물어 뜯어낸 권투선수 타이슨의 과격성과 잔인함이 떠오른다. 이러한 연상은 인간과 핏불 모두가 싸움판에서 동종을 죽이는 유일한 종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투쟁의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개발한 경기의 주인공으로서 복서와 핏불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투쟁과 정복의 역사이며 전쟁이 아닌 평화의 시기에도 경기를 통해 폭력에 대한 광적인 찬미를 실행해 온 역사였다. 박찬용의 작업에서 투쟁에 목숨을 건 고대 검투사의 망령들이 탐지되는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박찬용의 조각에는 인간의 심리에서 역사에 이르는 다양한 메시지들이 숨어있다. 네 번째로 치루게 되는 이번 개인전에 작가는 모두 열 한 마리의 개 조각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들 모두는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두 마리는 거대하고 나머지 아홉은 실물크기의 것이다. 거대한 두 마리의 핏불은 서로 등진 채 버티고 서 있는데 거대한 금속 파이프가 두 짐승 사이를 가로질러 연결시키고 있다. 일견 교미의 장면을 연상케 하지만 실재로 이들은 모두가 숫놈들이며 동일한 원형에서 주물작업을 통해 복제되어 거의 유사한 외형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한편 아홉 마리의 개 조각은 모두가 뒷다리를 들어 오줌을 배설하는 특유의 동작을 취하고 있는데 주둥이에는 철망이 채워져 있으며 목에는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이중의 차단장치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배경에 설치된 철장은 못이 성글게 박혀 있어 이들 투견들의 폭력성을 상대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하나의 공간에 채워진 이들 핏불 조각은 관객들에게 매우 다양하면서도 강렬한 분위기를 던져준다. 전시장을 들어서면서 우선 우리는 동물들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절단된 몸체의 파편들을 용접기술을 통해 재조립한 방식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조립된 단편들은 서로 어긋나 있어 개의 존재가 비어있는 껍질의 조합이라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조형방식은 핏불에 투사된 인간의 욕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 결과로 여겨진다. 인간이 실행하는 폭력과 투쟁의 욕망이 라캉이 말하는 현대인의 분열된 주체를 반영한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려는 것일까? 관객들에게 맡겨진 해석의 의미들이 하나로 정리되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작가의 새로운 조형방식은 핏불이라는 대상을 둘러싼 의미가 다른 차원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
박찬용의 작업에서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거대한 두 핏불 조각 사이를 잇고 있는 거대한 금속 파이프에 나타나는 <관계성>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 파이프를 조각상과 함께 전시장 초입에 배치하여 관객의 진입을 의도적으로 차단시킴으로서 불편한 심리를 발생시키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전기했듯이 그것은 수컷의 성기로 묘사되어 있으며 나아가 암수의 교합 행위에 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야생의 세계에서 성교의 행위는 힘의 과시이며 권력의 행사를 통해 대상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굴복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자신의 혈통보존과 번식이며 강한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에는 암컷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관계성의 장치로 표현된 거대한 금속 파이프의 섹쥬얼리티는 숫놈들이 사는 세상의 겨루기 행위와 그 투쟁의 알레고리를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로 박찬용의 개 조각에서 주목할 부분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알레고리의 실체이다. 어떤 의미를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빗대어 넌지시 비추는 기법은 예술표현의 가장 대표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 방식 또한 상징에서 은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개 조각의 사회적 알레고리에 대해 작가는 <가까운 자들의 관계>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투견에서 나타나는 동종 살해 또는 공격성은 불가피하게 가까운 자들의 관계에서 빗어지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은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자신이 속해있는 울타리 안에 있다. 이 때 개싸움의 알레고리는 최근의 집권당이 벌이는 싸움의 형국처럼 정치 사회적 현실로 확산되고 있다. 박찬용의 시각은 결코 정치와 정치인을 향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알레고리의 특성은 현재의 시공간을 꿰뚫어 관통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생각할 요인은 박찬용이 개 조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들로서 철장과 입망 그리고 쇠사슬이 주는 상징성이다. 철장은 구속, 차단, 격리 또는 대상의 보호라는 일반적인 차원과 함께 심리적으로 공격의 본능을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마치 사회의 법규나 윤리적 규범이 집단을 제어하는 것처럼 박찬용의 작업에 등장하는 욕망하는 개들은 철장과 입망 그리고 쇠사슬에 의해 이중 삼중적으로 단속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단속된 아홉 마리의 개가 취하는 배설의 동작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개 과(科)의 동물에 있어 오줌의 배설은 영역 확인을 위한 본능적 행위이자 소유의 욕망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그러나 몸과 입이 동시에 묶인 상태에서 갖게되는 의미는 본능이 억압된 상황과 그 결과로 발생하는 갈등, 나아가서는 싸움개가 겪는 모순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박찬용의 예술에 빠트릴 수 없는 점은 개 조각에 나타나는 조형적 측면이다. 앞서 언급한 철장과 입망 그리고 쇠사슬이 주는 효과를 조형적 측면에서 보면 미학적 쾌의 대상이 된다. 거칠고 무거운 알루미늄 조각 덩어리로 제작된 볼륨에 대해 세밀한 리듬을 제공하는 이러한 선의 이미지는 개의 표면에 거칠게 각인된 헤라 터치나 용접부위의 물성과 더불어 조형적 완성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인체조각이 그런 것처럼 동물 조각 역시 작가나 관객에게 친숙하고 잘 연구된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 형태나 비례를 완벽하게 일구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현대조각의 영역에서 인체와 동물을 다루는 작가가 드문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박찬용의 이루어낸 조형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정당한 것이라 생각된다.
박찬용의 핏불은 다양한 메시지와 조형적 성과를 통해 시대와 욕망에 의해서 개량된 사고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작품제작과 해석의 시의성(時宜性)이 현대조각의 영역에서 지향해야할 하나의 방향이라면 박찬용은 단연 그 선두주자의 한사람이다. 그의 조각은 권력과 욕망과 섹슈얼리티 나아가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실체의 허구성에 대해 여유를 잃지 않는 날카로움과 성실한 조형언어로 발언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이 지닌 가치는 그것이 인간 존재를 성찰하는 담론에 하나의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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