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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전시서문, 평론

[전경선]서사조각, 하이퍼픽션을 예시해주는 조각

서사조각, 하이퍼픽션을 예시해주는 조각



-고충환-


  

이야기가 있는 조각, 서사적이고 문학적인 조각, 전경선의 조각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받게 되는 인상이다. 보통 조각이라고 하면 양감과 물성으로 다가오고, 형상을 다룰 때조차 그 자체의 자족적인 형상(성)이 강해 형상에 함축된 의미나 내용이 이야기로까지 파생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전경선의 경우, 좀 과장시켜 말하자면 이야기가 주가 되고, 조각은 그 이야기를 뒷받침 해주는 일러스트와도 같다. 작가의 조각에서 느껴지는 회화적인 인상 역시 이러한 사실의 인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그의 조각은 말하자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면서 일종의 회화적인 조각을 실현하고 있고, 환조와 부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조각이 형상되는 또 다른 지점을 예시해준다. 무슨 평면회화처럼 벽에 걸리는가 하면, 살이 없는 몸에 섬세한 세부를 거느리고 있어서 실체감을 결여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모호한 형상을  향해 열려있다. 살이 없는 몸이 작가의 조각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어준다면, 그 몸에 수반된,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섬세한 세부가 또한 현실적으로 만들어준다.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 현실과 비현실간의 불투명한 경계에 대한 인식이 작가의 조각을 견인하는 동력이 하고나 할까.

  현실과 비현실간의 불투명한 경계에 대한 인식? 이야말로 초현실주의를, 초현실주의의 핵심논리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작가의 조각은 마치 있을 법 하지 않은 비현실적 사실을 생생한 현실인 양 재생하는, 초현실주의의 편집광적 그리기를 닮아있고, 그 조각적 버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초현실주의에서 비현실주의에서 비현실적 사실은 말 그대로 배현실적 사실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에게 비현실적 사실로 아려진 꿈과 무의식이 정작 토현실주의자들에게는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나아가 현실에서 억압되고 잠재된 욕망과 비전이 올올이 되살려진다는 점에서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로, 현실의 원형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억압되고 잠재된 욕망과 비전?

작가의 조각에 엿보이는 사물의 자유자재한 변태와 이질적인 것들의 자유자재한 결합은 다름 아닌 이런, 꿈과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억압되고 잠재된 욕망과 비전의 지업들이다. 그것이 자기를 들어내 보이는 방식은 현실이 드러나 보이는 방식과는 다르다. 가역적이고 비결정적이며, 해체적이고 구별이 없다. 그 언어용법은 비논리적이어서 현실의 논리에 상충하는 관계로(형상에는)억압되고 잠재되어 있으며, 꿈과 무의식의 지층으로 추방된다.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꿈과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걸려 올려 진 억압되고 잠재된 욕망과 비전의 지점들을 열어 보이며, 기억과(투명한)의식이 유사한 계기에 의해 작동되는 것으로서 호출된다. 그리고 그 계기는 어느 정도 자유연상기법, 의식의 흐림 기법, 매직 리얼즘에 연동된다.

  투명한 것에 대하여, 내 머리 속에 생각이 둥지를 튼다. 그리고 그 생각의 둥지위로 온갖 새들이 날아와 앉는다. 새들은 날카로운 부리로 내 생각을 쪼아대기도 하고, 미처 흘러내리지 못한 채 고여 있는 눈물샘 에 부리를 박고 목을 축이기도 한다. 새들에게 내 생각은 그대로 거대한 숲이 된다. 아주 오래된 생각이 태곳적 원시림처럼 화석으로 굳어진 그 숲에 깃든 새들은 숲의 정령들이다. 그 중에는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반인반수도 있고, 한창 변태 중인 반인반수도 있다. 새의 머리를 한 인간, 그는 나이 억압된, 좌절된, 돌이틸 수 없는 욕망을 닮아있다. 인간이 되기 위해 날개를 저당 잡힌 그는 다소간 우울해보이기도 하고 무표정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새들은 현실의 하늘을 건너 내 생각속으로 날아든다. 오래된 폐허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내 생각의 풍경 속으로 잦아든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나의 또 다른 분신인 그는 나로부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있다. 그와 나 사이에 바람이 불면, 나는 불현듯 조각조각 해체되고 만다. 해체된 나의 몸은 그대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바람의 길이며 흔적 같다, 나와 너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있지만, 나와 너 사이에 바람이 불 때면, 나는 너에게 갈 수 가없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온전한 형태 같은 것은 없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변태중인 반인반수처럼 변 퉁이고, 생성 중에 있는 지도 모른다.



  10월 늦은 오후에. 그리고 나는 거울 속에서 또 다른 분신을 본다. 나는 거울이 보여주는 나(너)를 오전한 형상으로, 그리고 이에 비해 정작 거울 밖의 나를 불완전한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거울을 통해서 보는 나(너)는 행복해 보이는데, 정작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상은 행복하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비전이기 때문이다. 현실 원칙에 위배되는 억압된 욕망이 빛어낸 형상이기 때문이다. 



  One. 작가의 조각에는 곧잘 거울이 등장한다. 그 거울은 무슨 관문 같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이어주는. 그렇게 나는 거울저편의, 선냥갑 같은, 위가 열린 상자 속으로 깃든다. 그 속에서 나는 불에 탄 채 재만 남은 나의 분신을 끌어안는다. 그 분신은 무슨 애른스트의 그림 속에서 날아온 새 같다. 그런데 정작 그에겐 날개가 없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운명 지워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새들이 어쩌면 내 자신보다도 더 오래되었을, (내) 생각의 숲 속에 둥지를 튼다.



  투명한 것은. 작가에게서 무엇보다도 투명한 의식을 의미한다. 보통의 언어용법은 불투명하다. 그 의미가 불투명하다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의미로 치자면 지나치리만치 투명해서, 자기 외적인 것(타자)에 해한 포용럭이 없다. 고독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로지 엄격한 자기동일성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 고돌은 자자가 죽은 자리로트터 생성되며, 족자의 자유타재한 읽기와 개입과 간섭과 변용이 수행되는 장소다. 현실원리가 허물어지는 자리며, 언어에 해한 형식실험이 수행되는 자리며, 도사(자기동일성의 논리)로부터 죽은 언어가 구제되고 새로운 언어가 생성되는 자리다.

  이 언어용법이 실혐되는 자리는 대개 동화적이고 마술적이다. 동화의 표면적인 서사는 보통 산남선녀가 맞이하는 권선징악의 결말로 즉징된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된 서사를 캐내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그렇게 억압된 나, 때로는 다소간 우울해보이기도 하고 무표정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낯설어 보이고도 한는 나(타자)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있는 나(분신)와 맞닥트리는 계기로서, 동화를 전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술적이란 말할 것도 없이 현실원칙을 위반하는 언어용법이 실험되는 자리다.



   작가의 조각은 서사구조 그대로 독자의 자의적인 읽기와 해석에 대해 열려있는 텍스트의 의미구조를 닮아있다. 기의 대신 기표를 생성시킨다는 점에서 상징텍스트보다는 생성텍스트(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닮아있고, 따라 익는 대신 고쳐 쓰기를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독자적 텍스트보다는 작가적 텍스트(롤랑 바르트)에 가깝다.

  환조도 아니고 부조도 아닌, 막 형상을 찾추어가는 중인 것도 같고, 이와는 거꾸로 온전한 형체가 해체 중인 것도 같은 작가의 조각은 모호한 경계에의 인식에 의해 뒷받침되며, 더욱이 여기에 동화적이고 마술적인 서사마저 더해져 보기 드문 개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전경선, 조각가 전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