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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전시서문, 평론

[박찬용]서커스, 짐승들의 느와르

박찬용의 상황주의 조각


                    서커스, 짐승들의 느와르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박찬용은‘욕망의 도시’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그리고 근작에서의 ‘서커스 연작’ 등을 통해 일관된 주제의식과 함께, 일종의 상황주의로 범주화할 만한 경향성의 조각을 실현하고 있다. 도시의 이미지와 투견 그리고 서커스 등으로 그 소재는 매번 다르지만, 그것들이 하나같이 삶의 본성과 그 조건을 암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도입된 일종의 유비적 표현이란 점에서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조각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모사의 소산이 아니다. 이는 다만 현실성을 강화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마치 세팅된 무대처럼 재현해 놓음으로써 개별 작품이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하기보다는 서로 어우러져서 상황을 연출하고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작가는 여자와 맹견 그리고 서커스 단원들이 출연하는 삶의 무대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도시. 주로 갱들을 소재로 하여 비정한 도시와 그 삶의 생리를 드러낸 영화를 필름 느와르로 분류한다. 사실을 과장하고 극화하는 영화의 속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들에서 그려지는 갱들의 모습이 기실 현대인 일반의 삶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은 살아남기 위해 적과의 동침마저도 마다하지 않는 정글과도 같은 도시, 밤의 대통령이 지배하는 비정하고 비열한 도시, 화려한 외출을 유혹하며 꿈을 한갓 욕망으로 변질시켜 놓는 도시의 환락 속에 마약처럼 빠져든다.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인상의 회색빛 콘크리트 구조물과 화려한 네온 불빛이 대비되고, 공허함과 욕망이 부닥치는 도심의 한 가운데에서 여자는 웃음을 팔고 남자는 배반을 거래한다. 그리고 마음씨 좋은 이웃 같은 맥도날드 아저씨가 소비로써 생산을 견인하는가 하면, 쇼핑마저도 아트로 포장되는 천민자본주의 시대의 욕망을 미소로써 증언해준다. 박찬용은 회색빛 도시와 화려한 욕망의 편린들을 대비시켜 비정한 도시의 생리를 드러내고, 그 욕망의 크기만큼의 소외와 공허감을 되돌려준다. 그가 연출한 도시의 이미지와 그 속에 담겨진 현대인의 초상은 한편의 필름 느와르를 보는 것처럼 피상적이고 감상적이고 삭막하다.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맹견 아메리칸 핏불테리어(줄여서 핏불)는 순종이 아니라, 투견으로서 요구되는 모든 우성인자를 결합해 만든 혼성잡종이고 개량종이다. 투견의 요구조건에 부합할 수 있도록 가장 완벽하게 진화한 종인 셈이다. 그러나 이때의 진화는 자연적인 진화가 아닌 인위적인 진화이며, 인간의 욕망에 의해 주도되고 조작된 진화, 잘못된 진화일 따름이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은 진화마저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있다. 심지어 진화는 공공연하게 선보다는 악을 지향하는데, 이는 생존법칙 때문이다.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 힘보다는 지략과 권모술수, 논리보다는 현란한 변명과 자기방어, 소요(逍遙)하고 사유하는 정신보다는 머리가 텅 빈 행동하는 인간(요새 말로 치자면 무뇌인)이 우성이다. 이로써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의 바벨탑은 필연적으로 파괴와 파멸을 향해 나아가며, 나날이 성악설을 실현하고 있다.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살해와 폭력의 욕망을 껴안고 산다. 이에 대해 적어도 외관상으론 제도화된 사회가 그 욕망이 표출되거나 실현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만, 그런다고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이를 투사할 대상을 찾아내고야 말며, 제도는 그 욕망이 적절하게 표출되도록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희생제의와 가짜 왕 놀이(거지를 왕처럼 후하게 대접한 후 축제 마지막 날 죽이는), 유태인과 예수, 마녀와 정신병자, 동성애자와 왕따, 개똥녀와 된장녀, 보수꼴통과 진보깡패 등 문명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개인이 자신의 적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투사할 수 있는 희생양을 제공해왔으며, 지금도 제공하고 있다. 이렇다할 희생양이 없으면 만들어내야 하고, 그 타이밍과 수위를 잘 조절해야 건강한 사회가 유지된다. 

박찬용은 핏불을 소재로 하여 진화론이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과 철저하리만치 배타적인 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지를 주지시킨다. 그리고 그 상황을 ‘가까운 자들의 관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정작 폭력이 투사되는 대상은 익명적인 타자가 아니라 친구이며 동료인 것이다. 


서커스 연작.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한 인간의 실존적 삶을 추적하고 기록한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는 영화 <그리즐리 맨>에서 알래스카의 야생지대의 주인인 회색곰과 함께 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다. 문명사회에 등 떠밀려온 주인공은 이곳이야말로 진정 나의 땅이며 나의 삶이라고 감탄하면서 야생곰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는 곰을 친구이자 동료이며 연인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감독은 곰의 눈에서 반쯤은 심심해하고 반쯤은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무정한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결국 곰이 되고 싶어 한 주인공이 야생 곰에게 잡아먹히는 비극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이 영화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을 증언하고, 길들여질 수 없는 야성을 주지시킨다. 야생이나 야성을 길들인다는 것은 정작 저들의 삶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논리이며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욕망은 심지어는 타자의 삶의 영역을 넘보는 침범행위이며 죄악이기조차 하다. 

박찬용은 근작에서 서커스 연작을 시도한다. 여러 독립된 상들이 모여 상황을 연출하고 서사를 만들어내는 이 일련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동물들과 함께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호랑이와 회색 곰 그리고 침팬지와 같은 동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여기에 이들을 길들이는 조련사와 무희 그리고 차력사와 같은 사람들이 어우러진다. 그들은 사실상의 광대로 보이며, 그 사정은 동물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외관상 동물들은 원래의 야성을 상실한 채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져 있다는 점에서 본성을 거세당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처럼 더 이상 위험하지 않는 동물들이 관객들에게 일종의 희극배우로서의 연기와 강요된 웃음을 선사한다. 이처럼 야성을 길들이고 잠재우는 기술은 그러나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로부터 유래한 것이기보다는, 원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도덕과 윤리, 금기와 터부의 이름으로 현상하는 온갖 제도적 장치들이 인간의 내면에 들끓는 욕망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한편, 동물들이 조련사에 의해 그 본성을 거세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련사와 광대 역시 관객들의 욕망에 의해 인간성을 거세당한다. 그들은 보란 듯이 남근을 과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때의 남근은 더 이상 권력과 욕망의 증거이기보다는 오히려 이에 대한 거세의 지표로써 다가온다. 조련사는 동물들의 야성을 거세하고, 관객 또한 조련사나 광대의 인간성을 거세하는 것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권력관계가 느껴지며, 그 자체 관음증에 바탕을 둔 일종의 시선의 정치학(시선과 응시의 관계역학)이 엿보인다. 조련사에게 길들여진 동물들이 더 이상 야생의 짐승이 아니 듯, 관객에게 봉사하는 광대들 역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핏불이 인간내면의 폭력욕망이 투사된 희생양이라면, 서커스 동물이나 광대는 희극욕망이 투사된 또 다른 희생양이다. 폭력욕망은 희생양에게 죽음과 같은 극적인 순간을 원하면서도, 정작 죽음 자체는 지연되기를 원한다. 관객이 원하는 것은 죽음의 이미지일 뿐 죽음 자체는 아니며, 죽음의 이미지는 욕망을 강화하지만 정작 죽음과 더불어 욕망은 끝장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극욕망은 희생양이 기꺼이 바보가 되어줄 것을 주문한다. 모두가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삶으로써 자신을 가장하는 시대에 누군가는 가식의 가면을 벗고, 그 이면의 부끄럽고 치졸하고 우스꽝스러운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 결국 관객이 광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은 타자를 향한 자신의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 이런 집단공모에 의해 지지되는 폭력의 정기적인 분출과 웃음으로써 소위 건강한 사회가 가능해지고 또한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박찬용의 조각은 사실적이고 극적이고 거칠다. 그의 조각은 삶의 장을 투견 장으로 그리고 서커스 장으로 바꿔놓는다. 마치 세팅된 무대 같은 그 장 속에서 우리 모두는 생존하기 위해 싸우고, 성악설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고, 진화론이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 그 투쟁의 와중에서 짐승들은 야성을 거세당하고 남근을 거세당하고 욕망을 거세당한다. 작가는 이 불임의 시대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회복되기를 원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것은 그 길들여지지 않음으로 인해 존중돼야 한다. 누가 누구를 길들이고 싸움으로 내몰고 웃음거리로 만드는가. 우리 모두는 심지어는 도망갈 출구조차 없는 그 장의 안쪽에 있을 수도 있고 그 바깥쪽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200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