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섭(전시기획자)
  사람의 형상은 그 자체로 오랜 예술의 표현 대상이었다. 지금도 이 형상의 매력은 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적 결단으로 재탄생 하고 있다. 누구라도 형상이 주는 이미지의 서술을 이해한다. 서있는 사람, 달려가는 사람. 그것을 그것으로 파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가지게 된다. 예술가들은 왜 그처럼 한 눈에 파악되는 형상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걸까? 많은 예술가들이 왜 같은 형상에 매료되어 있는 것일까? 사람의 모양은 사람의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제 각각 예술가들에게 있어 이야기를 담아내는 또 다른 서사구조로 작용하는 것일까? 물음의 내용은 어느 한 작가가 제작해 놓은 사람의 모양을 가진 그 결과에 걸린 내포와 외연을 파악함으로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작품에 있어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내포와 외연이 사실은 질문되어져야 한다. 강덕봉의 전시에서 만나게 되는 그 사람의 형상들도 같은 질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어느 시대에서도 사람 그 자체는 예술의 가장 궁금한 대상이 된다. 인간에 대한 관심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예술에 있어 항상 그러하다. 구조적으로 서사가 담기지 않는 경우 우리는 비록 보이는 형상이 사람을 닮아 있다 해도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솔직하게 지적하자면 어떤 형용을 거부하는 사람의 이미지는 보는 것 자체가 힘들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에 대고 무슨 말을 덧붙일 것인가? 의미가 사라진 또는 의미가 과잉된 수사의 세계에 빠질 뿐이다. 강덕봉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품 모두는 우리에게 수사가 제외된 대상 이해를 요구한다. 한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 이 모상은 실제로 인간형태의 모상임을 그대로 내보일 뿐이다. 작품을 본 후 말과 문자로서 과잉된 표현이 절제되어야만 작가의 회심(懷心:마음에 품은 생각이나 뜻)에 다가갈 수 있다. 섣부른 결론으로 달려 가보자면 작가가 던진 질문은 ‘모상의 실재’를 통해 현실에서 사람을 통(通)함이다. 어려운가?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사람은 사람 이상이다. 항상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현실에서 늘 그 사람다움보다 부족한 존재다.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존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이 규정적 혼란 안에서 저마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 더 알려서 그렇게 알려져서 비로소 유명해져야 한다는 강박증을 자초하며 살고 있다. 상대방보다 늘 앞서거나 똑똑하거나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져서야 나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한다. 그런 피곤한 삶을 자처하며 살고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이런 비인간화의 진행을 인간 스스로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의 문제는 예술에서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강덕봉이 인간 형상의 모상을 형식적인 제일 주제로 삼아 다양한 변주의 작품을 내보이려는 의도는 바로 ‘모상의 실재’로부터 사고를 넓혀가려는 싸움으로 보인다. 그래서 통(通)하면 좋다. 외연으로부터 인간을 들여다보려는 작가의 선하고 깊은 눈은 이 전시의 장점으로 여겨도 좋으리라.
  자전거를 타는 아이의 모습이나 달려가 안기는 한 쌍의 실루엣도 형상을 읽는 한에서는 일상적 모습의 찰나일 뿐이다. 그런 찰나를 고정시키는 일은 아이디어다. 작품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나 그 자체로서 완성되지 않는다. 대상을 바라보는 깊은 눈만이 작품을 완성한다. 힘을 실어준다. 강덕봉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수많은 일상의 찰나들은 어떤 힘으로부터 완성되어 가는가? 무엇을 우리는 그 형상을 보며 작가와 작가의 주제 던짐과 通해야 하는 걸까?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외연을 심도 있게 사유함으로써 비롯된다. 이런 부류의 노력은 작가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관람자의 유덕한 대중지성에 호소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작가의 제작의도를 찾아보는 일이다. 작품은 이런저런 단서들로 구성되어 있어 우리는 단서를 모으고 분류하며 분석해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형태가 일상의 실루엣으로 찰나에 잡혔다는 점은 유효한 단서가 된다. 그의 전시를 구구성하는 각양각색의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하나의 연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럼으로 작품을 보는 입장에서는 각각의 작품을 하나의 언술 안에 놓아두어야 한다. 그의 작품은 특징적인 계급이나 직업군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의 작품에서는 소품을 통한 연상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가방의 흔적이나 자전거가 고작 그런 연상을 부추기는 소품으로 그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주변에 있거나 있어왔던 그리고 항상 그렇게 있을 형상들로만 제한되어 있다. 일상이라는 용어는 그래서 채집이 가능하다. 일상적 실루엣은 익명과 다중성을 함께 읽을 수 있게 한다. 그 용어가 주는 연상은 인간 일반이다. 작가는 인간 일반의 문제를 형상화 하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 그렇다면 다른 모상의 등장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강덕봉은 인간 일반, 인간 그 자체의 거기 있음에 대한 문제에 천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쉽지 않은 문제를 질문한다. 사람이 거기 있음은 당연한 만큼 관심 밖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강덕봉이 보여주는 작품재료들은 재료 이상의 역할을 한다. 사실 작품의 재료는 작품의 소재다. 작가의 제작의도가 정확하게 반영된 소재로서 작용할 때 그 작품은 완성도가 만들어 진다. 그런 점에서 파이프의 이용과 각재의 사용은 지금까지 그의 작품이 보여주었던 형식적 일면성을 잘 극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작품제작방식은 겉으로 보기에, 그러니까 작품을 일람(一覽)한 후 가지는 느낌으로는 절제된 표현만을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형상의 외형, 실루엣만을 간결하게 매만지고 있을 뿐 매우 복잡한 제작과정과 실루엣의 내부를 구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외형에서 질서 잡힌 듯 보이지만 체계적인 혼란을 이용하여 착란이라는 방식으로 정리되고 있다. 작가가 조형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실험이 특별하게 개성을 돋보이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 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세히 보고, 상세히 확인하지 않으면 작가의 제작 취미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굳이 빈 공간을 만드는 재료와 단면이 더 강조되는 나무각재를 사용했을까? 이 부분은 읽어야 할 텍스트가 되어버린다. 채워져 있으나 비워지는 재료와 전체와 부분이 하나임에도 연장된 바에 따라 전혀 다름이 드러나는 재료의 사용이 이 전시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작가의 제작방식이란 많은 조건에서 선택이 아니다. 선택의 기회에서 결단이 만드는 결과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의 재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필요하다. 강덕봉은 재료가 일으키는 현상으로서 환영에 착안 한 바 분명해 보인다. 이 환영은 작품제작의 의도 또는 예술의지에 닿아 있다. 모상이 실재함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에게 있어 인간에 대한 관심이 결국 재료 선택의 결단에 이어진 것이다. 추론하건데 그가 철판으로 매끈하게 실루엣을 정리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작품제작방식에서 작가가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소재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복잡계의 감각적 수용은 작가의 결단이라는 직관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작품을 통해 내보이는 최종 의도는 보이는 것이 그것으로 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과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과도한 해석을 시도하는 점은 작품을 이해하고자 할 때, 예술가의 감성이라는 부분을 보다 명확하게 기술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들의 예술적 능력으로서 직관을 이성의 한 부류로 파악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예술가의 작품은 참에 대해서 말하고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렇게 이해되어지는 한 작품의 재료와 그 선택은 작품 전반을 함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