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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전시서문, 평론

[평론]강성훈_동선(銅線)으로 구축한 매스와 공간의 세계

동선(銅線)으로 구축한 매스와 공간의 세계   


글ㅣ홍경한(미술평론가)


Ⅰ. 조각의 본질을 이루는 기본 요소는 매스(mass)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간과 구조가 개입될 때 비로소 조각성을 명징하게 옹립한다. 이 가운데 매스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덩어리, 이미지조합을 넘어 작가가 전달하고자하는 조형언어-메시지의 몸체에 해당한다. 그리고 공간은 그 언어를 형상이라는 거푸집에만 머물지 않도록 확장 유도하는 비가시적 무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조(structure)란 매스와 공간을 잇는 브리지(bridge)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여타 조각들이 그러하듯, 강성훈 작업에서 역시 조각성을 뒷받침하는 이 세 가지 알고리즘이 가장 원만하고 자연스럽게 호흡해야 제 기능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강성훈의 작품은 해당 작품이 지닌 자체의 형상만으로는 참 맛을 느끼기 어렵다. 그의 동물 연작들은 조각의 근본 조건들이 치밀하게 교합함으로써 그 의미가 가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들 간 상호호혜 작용이 들숨과 날숨처럼 민감하게 교차할 때 비로소 가치 상승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전 전시를 통해 우린 강성훈의 작품들이 위 언급한 조각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그리드(grid) 되느냐에 따라 효과의 가중이 달라졌음을 목도해 왔다. 형상이 무엇을 담아냈느냐가 아니라, 공간과 구조의 간여가 형상을 더욱 빛나게 하기도, 평범한 묘사로 머물도록 하는 중요한 분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Windymal(Windy+Animal의 합성어)>을 주제로 지난 2010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치른 개인전만 해도 매스는 비교적 간결하고 인지 가능한 것이었고, 다소 우직한 여운의 이미지가 그러했듯 금속의 질량이 체감되는 무게감과 형상을 지탱하는 선의 상주(常住)를 공간이 적극적으로 이어주는 구조였다. 그것은 매우 나름 손발이 맞았고, 그럼으로써 효율적으로 어우러질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어느 하나가 누락되었다면 그의 작품들은 그저 ‘동물’과 ‘바람’이라는 모티프에 종속되는, 크거나 작은 물리적 시선에 의존한 평가가 지배적이었을 것임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나아가 그의 작품이 지닌 보이지 않는 지향점을 발견하기도 힘들었을 것임을 예상하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이에 강성훈 작업을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형상이 (친절하게)제공하는 이미지의 규정을 벗어나 그 매스를 구축하는 공간과 구조까지 두루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의 작품에서 참맛을 읽어낼 수 있다.



Ⅱ. 앞서도 언급했지만 강성훈의 작업을 논할 때 우린 대개 형상에 초점을 맞춘다. 호랑이, 코뿔소, 하마, 물개, 양, 코끼리 등 체계화된 랑그(langue) 마냥 공히 인지 가능한 코드에 시선을 고정시키기 일쑤다. 그러나 그 동물들은 부피를 지닌 덩어리로서의 의미 외, 몇 가지 다른 부연을 통해 다름을 용인할 수 있다. 일단 그가 선택한 사물들은 단순히 재현의 동물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그건 척추동물의 한 강을 이루는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포유류’로 해석되며, 나름의 사회 속에서 살고 살아가며 먹고 먹히는 경쟁 관계라는 점에서 우리네 삶과 등치를 이룬다. 더불어 휘날리듯 공간으로 빨려나가는 동선(銅線)의 굴곡은 진행과 정지를 반복하는 구성원들의 자화상을, 멈춘 듯 리듬을 갖춘 역동적 동세는 흡사 매일 정신없이 살아가는 나와 우리에게 강요된 속도와 불안과 평화가 공존하는 모순을 상징한다 해도 지나친 감은 없다. 


그러나 그 동물들은 흔히 ‘동물’이라 음성화 하는 생물계의 파롤(parole)을 살짝 억누를 때 더욱 밀도 있는 작품성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즉, 미를 구성하는 조형요소와 원리를 고찰함으로써 고정된 외피의 한계를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쉽게 읽히는 바람이나 동물이 아니라 공간과 구조이다. 실제로 동물을 감싸고 있는 그의 모든 작품들은 공간을 텃밭으로 외부 형태와 내부형태가 상이성을 지니는 특징이 있다. 공간을 무대로 비움을 채움으로 치환해 하나의 형태를 구축하는 독특한 양태가 그것을 증명하고, 특히 이번 전시의 대표 작품이랄 수 있는 거대한 크기의 ‘소’는 그 예제로서 적절하다. 


얇고 가는 동선(銅線)으로 구축된 우람한 ‘소’는 위용을 자랑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 공간이 텅 비어 있다. 자유롭게 바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빈 공간이 많다. 허나 ‘헐렁함의 견고함’은 되레 상상을 촉발하고 기복(대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대조성)을 유지하며 운동감과 리듬감, 속도감을 심어준다. 그것이 비록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기에 추상적인 여운을 지니지만 작가의 조형언어를 구축하는 하나의 장치로 이해해도 아쉬움이 없다. 반면 완성된 조각은 추상을 지나 실제적인 것으로 자릴 잡는다.(이 역시 그의 작품의 내적 특징이다.) 이는 그의 조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양과 음의 결합이자 리얼리즘과 추상의 관점이 고루 융합된 결과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강성훈의 작업에 대해 단지 ‘소’나 ‘코끼리’의 형상을 빌려온 이미지, 작가 개인이 겪는 다한증으로 인한 바람의 흔적 등으로만 한정짓기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Ⅲ. 강성훈의 작업과 관련해 또 하나 거론해야할 것은 비물질에 해당하는 공간을 휘고 도는 (극히 노동집약적인)선(線)의 효율적인 쓰임이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작업은 전반적으로 주변(장소 혹은 공간 자체)을 장악하며 작품과 직접 연계되는 양상을 갖는다. 리본처럼 휘날리는 선의 흐름이 지날 수 있도록 길을 트는 것도 공간이요, 강성훈이 만든 형상의 독자성을 보증하는 것도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과의 호흡을 연계하는 선의 효용성이야말로 작가의 작품을 변별력 있게 만드는 매우 절대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작가는 동물을 조각이기 위한 프레임 일부를 제외하곤 공간을 거의 비워둔다. 대신 마치 드로잉 같은 선을 통해 특정한 사물의 가시성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즉 형상을 완성하는 기본 골격인 선은 동물이라는 보편적 이해의 실제성과 공간과의 암시성을 완성하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선이 공간에 침투하면서 암시성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암시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포박함으로써 오히려 실제성을 확장토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관람자들은 선이 건설한 실제성에서 물질적인 인식을 부여받고 공간과의 조용한 숨을 읽음으로써 암시성을 체화하게 되며, 전반적인 울림을 체험하게 된다. 혹자는 그 암시성으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무의식 속의 상상의 선까지 소화하곤 한다. 그만큼 조각이라는 입체 형상이 제한 없는 지점으로까지 확대되는 셈이다.   


선과 공간 관련해 흥미로운 부분은 결국 그의 선들은 의식(conscience)의 대리라는 점이다. 즉, 독일의 철학자 훗설(Husserl)의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는 말에서처럼 그에게 선이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의 결정이면서(당연하게도) 자신의 경험의 수집이자 통일시키는 작업태도를 엿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의식의 상태’가 ‘상태의 의식’으로의 전이를 일컫는다. ‘의식의 상태’가 의식의 위상기능, 즉 지각(知覺), 느낌, 감동(感動)이라면, ‘상태의 의식’은 어떤 작용 능력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갖는 지향의식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강성훈의 작업은 이미 행동을 구성한 상태에서 시작되며 일정한 좌표를 결정하는 미적 구동으로서의 선과 공간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생성된 것이 바로 오늘날 선보이고 있는 그의 형상조각이고, 그 조각들은 공간 속에서 자리하며 연계됨으로써 자칫 동물에 국한될 뻔 했던 이미지를 새로운 공간과 공명이라는 수순을 밟는다. 


Ⅳ. 가느다란 금속선을 일일이 이어 붙여 거대한 형상으로 재구성되는 그의 작품들은 적어도 지금의 그에게 미적 의미를 완성시키는 의식의 집합체임에는 틀림없다. 동물을 주로 다루지만 외부세계에 대한 지각, 그 지각 속에 안주된 내적 감정, 작가 개인의 생각과 삶이 빛처럼 금속내부로 투영된 것이라는 사실도 부정하기 힘들다. 이러한 투영은 매체와 공간 간 구조를 낳고, 오랜 시간 공들여 잘 계산된 조각품으로 태어나 정립된 실제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거머쥔다. 그리고 지난 2010년의 전시에서나 이번 초대전에서나 그 양태는 동일하게 엿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꼭 구상적인 것(figuratif)에 머물 이유는 없다. 구상적인 경향이 재미있고 편안하게 느껴진다거나, 설명적인 이야기 식으로 풀어가는- 혹은 주제에 대한 소통이 원활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멈춰지면 이는 일정한 한계와 마주하게 된다.(많은 이들이 시각적이거나 물리적인 형태로만 판단하고 재료와 형식의 문제로 뭉뚱그려지는 측면이 있음이 그것을 증거 한다.) 


따라서 향후 작업은 가시세계의 외양을 재현하는 리얼리티의 관습에 따른 조각양식과는 거리를 두는 것(데리다(Jacque Derrida)가 재현으로부터의 도피 불가능성에서 지적하듯 여기서 말하는 거리두기란 리얼리즘의 말소나 지배가 아니라 자기 의식적으로 재현의 존재의미를 일깨우고 리얼리즘을 분해하여 재창조하는 것을 말한다.)이 바람직하며 형상적인 것(figural)의 수용 강화를 진일보의 조타로 삼아야 한다. 더불어 선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적용하고 자신의 작업에서 가장 특징적이며 장점이랄 수 있는 선을 다양한 방법적 형상수단으로서 활용하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다. 특히 공간과 물질이라는 상반적 요소의 사실적 공존성이 긍정적이긴 해도 현재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내면성, 살아 숨 쉬는 숨결을 한줌 한줌 불어 넣는 것이 훨씬 유의미할 수 있다. 이는 작가적 역량 측면을 고려할 때도 그렇고 강성훈의 경우 테크닉 이상으로 감각이 뛰어나다는 점, 변화의 의지나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사실에서 무리한 주문은 아니지 싶다.■  


작가 홈페이지 : http://kangsunghoon.kr/


강성훈, 조각가 강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