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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전시서문, 평론

[염성순]담을 수 없는 것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회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회화

-하얀사과 파란사과 하얀불꽃, 염성순 9회 개인전 평론 2010-

이선영 (미술평론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는 전시부제 ‘파란 사과 하얀 사과, 하얀 불꽃’은 매우 비의적으로 들리면서도, 감성과 개념, 그리고 의지와 끈기가 진하게 응축되어 된 염성순의 이번 작품들의 도상들을 평이하게 서술한다. 작품들에 등장하는 사과나 동그라미는 재현적 대상이나 그것의 추상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원형적 덩어리를 상징하며, 그것은 때때로 내부로부터 불타오르며 하얀 연기를 뿜어낸다. 사과에서 발산되는 하얀 연기들은 외부로 발산될 에너지의 용량을 풍부하게 비축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발산되는 것은 감미로운 분위기만은 아닐 듯싶다. 곁가지적인 이야기이지만, 1980년대를 통과해온 세대에게 매캐한 ‘사과탄’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하얀사과 파란사과 하얀불꽃]은 마치 프랑스식의 미로 정원 같이 꾸며진 공간에 사과 3개가 놓여 있다. 저 멀리 펼쳐질지 모르는 별천지를 찾아 나선 사과들은 돌멩이처럼 굳은 모습과 두둥실 꽃 그림자를 달고 있는 모습, 하얗게 기화되는 중의 사과로 구별된다. 그것들은 세상이라는 그럴듯한 가설무대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굴러다닌다.

여기에서 작가와 가장 근접한 캐릭터를 뽑으라면 연소중인 사과가 아닐까. 염성순은 오직 그림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는 불을 품은 작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008년 전시에 이어,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선적 요소는 안도 바깥도 아닌 모호한 공간감을 연출한다. 구조는 위아래가 뚫린 듯하며, 아래는 대지가 위에는 창공이 펼쳐진다. 대지와 창공은 자연이 선사하는 풍부한 색감으로 채워진다. 여기에서 사과들은 밖에 있으면서도 안에 존재한다. 사과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나 근처에서 일렁이는 기운들은 그것들이 죽어있는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수수께끼 같은 장치들과 살아있는 물질이라는 비유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을 연금술적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연금술은 언어의 투명성이 아니라, 언어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염성순의 작품 속 상징은 그 뒤의 무엇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자체로도 향유할 만한 실재성을 가진다. 작품 [하얀사과, 파란사과]는 반투명한 정방형 구조물에 희고 푸른 원과 사과들이 놓여 있다. 대지와 하늘 사이에 걸친 기하적 구조와 사과의 배치라는 비슷한 구조이다.

그것은 허공에 떠 있지도 심연에 가라앉지도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한 축에 보다 ‘적절하게’ 위치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은 늘 빗나가며, 이러한 빗나감이 늘 상 하는 일이면서도 매번 막막하기 그지없는 빈 캔버스 앞에 다시금 설 수 밖에 없는 동인이다. 기하적 구조가 수도원 같은 하얀 건물처럼 보이는 [하얀 불꽃, 푸른 구슬]에서 그 아래로 연기가 굳어진 듯, 불확정적인 실루엣을 가진 정체모를 하얀 괴물 옆에는 푸른 구슬 두 개가 놓여 있다. 괴물은 구슬에서 빠져 나온 듯하며, 때가 되면 다시 구슬로 변모할 것이다. 이 비의적인 장면은 접히고 펼쳐지는 생명의 과정을 닮았다. 창공과 대지에 펼쳐진 오묘한 자연의 무늬는 예술의 언어로 명확하게 번역되어 있어, 열락에 빠져 있는 이 반인반수의 무아지경을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직선과 곡선의 대조는 아예 사각형과 원의 만남으로 압축되기도 한다. 작품 [다섯개의 하얀불꽃]은 화면 위1/3에 수(지)평선이 그어져있고, 5개의 사각형과 원이 마주한 조합이다.


사각형은 붕 떠 있는 동그라미를 막아서는 형세를 가지면서 동그라미에게 명확한 위치를 설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늘과 땅을 구별할 수 없는 심연의 공간을 열어 제처 동그라미로 하여금 또 다른 차원으로 통과하게 하는 문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것은 분명히 어느 지점에서 발화하기 시작하는 존재, 어떤 임계점에서 또 다른 차원을 여는 지각의 문을 연상시킨다. 원이 통과하기에는 비좁은 문이지만, 명확하게 각진 투명한 통로는 공포스러운 심연을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그것은 동그라미와 네모의 관계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언어의 작동방식을 표현한다. 조형예술을 포함한 언어적 표현에는 늘 잉여의 몫이 존재하며, 출구를 찾지 못한 잉여는 침묵과 비명으로 귀결될 수 있다. 염성순의 작품은 뚜렷한 계획 없이 시작하여 각고의 고투 끝에 자신이 원했던 미지의 형상을 쟁취하는 스타일이지만, 이렇게 달성된 명료한 언어 이면에는 침묵과 비명이 공명하는 잉여의 공간과 침전물이 남아있다. 연소되고 남은 재와 낙진들은 색채나 반짝이 같은 재료와 융합되어 화려함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방식으로 변모한다.


오랫동안 강한 색채 대비 만으로 화면의 내재적 골격을 지탱해 왔으나, 새로 도입된 직선적 요소는 보다 직접적인 대비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에 대해 그림에 끌려 다니기 보다는 주도적인 차원에서 그림을 이끌어가려는 의지의 발로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직선과 곡선은 형태와 질료의 대조 같은 자체의 명료한 공리적 정의를 가지기 보다는 직선이 아닌 것으로서의 곡선, 곡선이 아닌 것으로서의 직선이라는 부정적 정의에 더 가깝다. 인간이 신을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기에 부정신학이라는 것이 있듯이, 염성순의 작품 속 조형요소는 차이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명료한 형태에 기반을 두지 않는 그녀의 작품은 코드화된 원형적 무의식 보다는 차이에 의한 연기(차연)라는 현대적 사유와 더 가깝다. 선들은 마치 나침반처럼 안과 밖, 위와 아래를 설정하려 하지만 모호한 덩어리들이 범람하는 경계면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모호한 덩어리들이 사과나 원이라는 형태를 입고 있지만, 그 또한 변모의 단계 중에 있는 과정적 존재일 뿐이다.


작품 [푸른 사과의 기억들]은 분리되면서 연결된 4개의 작은 작품들이다. 보랏빛 푸른색이 우주의 자궁처럼 웅크리고 있는 형상은 그 안에 떠 있는 또 다른 생명의 기운들을 품고 있다. 강한 형상의 배경은 로코코 식의 풍경화처럼 채색된 연분홍빛 하늘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하늘빛은 생명 잉태의 과정에 충전된 사랑의 힘을 증거 한다. 염성순의 작품에는 밤과 낮이 공존하듯이, 심연과 공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사랑이 있다. 작품 [백야]는 산수화와 같은 시점을 가지는데, 희고 검은 패턴들이 산이나 물결, 알 수 없는 동식물로 변모하며, 달 같은 노란 덩어리들을 낳는다. 태곳적 대지로부터 원형적 덩어리가 탄생하는 광경이다. 장관을 이루는 화면 전체를 감싸는 것은 멈출 수 없는 율동이다. 작품 제작 시에 핑크 플로이드나 루 리드의 음악같이 중독성 강한 음악을 즐겨 듣는 작가는, 음악에 의해 고조되는 심장의 고동을 그림의 박동으로 전환시킨다. 음악은 작품에 원초적인 에너지를 공급하고 뭉글거리는 몽환적 형상과 더불어 율동 감을 만들어낸다. 모호한 형상에 내재된 색채의 화음과 리듬은 직선이 나오기 이전에 형상들을 지탱시켜 주었던 힘이다.


이와 대조되는 직선적 요소는 비정형적 형상들을 구획 지으려 하고 흘러가는 방향을 설정하려한다. 무한정한 비정형 형상에 유한의 형태를 부여하려는 직선적 요소는 쾌락원리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현실원리처럼 보여진다. 세상과 담쌓고 문학과 그림에만 탐닉하던 작가는 언제부터인가 하루 종일 뉴스를 청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주요 뉴스부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진기한 일들, 증권가, 스포츠 소식같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것부터 결론이 뻔한 토론 프로그램까지 빠짐없이 챙기는 것은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 행위이다. 염성순은 자신이 ‘우주로, 허공으로 안 떨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림과 문학이 결국은 허구라면, 작가로서는 ‘땅을 딛고 싶은’ 욕망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찾아진 현실은 작가를 안심시킨다. 이 대목에서 나는 드디어 작가가 현실과 화해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이게 우리 토양이다. 이 더러운 토양 때문에 허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뉴스로 상징되는 현실은 그녀가 온몸으로 거부해 왔던 타협적 질서들로 가득하다는 것이 새삼 확인되고, 그림이라는 허구에 모든 것을 쏟는 자신의 선택에 합리화 및 보이지 않는 좌표가 되어준 것이다.


염성순의 작품 속의 현실은 이번 전시 작품의 ‘사과’에 부여된 의미처럼, 응집된 현실, 원초적 현실이다. 그것은 상징화된 지배적 언어질서 이전에 존재하는 현실계(라깡)나 기호계(크리스테바), 보다 멀게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처음 언급한 코라Khora와 가까운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코라는 모든 사물이 기원한 장소이다. 그러나 이 장소는 일종의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생각할 수는 있지만 가능할 법하지 않은 이 원초적 존재방식은 합리적 이해를 넘어선다. 코라는 꿈을 통해서나 접근할 뿐이다. 염성순의 작품은 우리 세계에 있는 모든 것보다 앞선다는 이 무정형의 공간과 관련된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불명료한 형태들이 존재를 대신하며, 모호한 흔적과 자취들이 실체를 대신한다. 존재가 발생하고 변모하는 신비로움의 이면에는 데리다가 '도착란destinerrance'라고 규정 한 바 있는 광기가 내재해 있다. 코라라는 이 모호한 고대적 존재는 현대적 사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예술의 원천적인 힘으로서의 코라에 대한 강력한 해석은 정신분석학적 입장이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언어가 발원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코라는 무의식의 최초의 자궁이라고 파악된다. 그러나 코라는 언어의 의미화 과정에 에너지를 공급하면서도 그것을 동시에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래서 코라는 의식이나 상징적 질서에 의해 억압되고 구조화 된다. 그러나 코라는 ‘상징적 법과는 다르지만, 불연속성들을 일시적으로 접합시키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불연속성의 효과를 발휘하게 한다’(크리스테바) 염성순의 작품에서 선(先) 언어적 기호의 영역은 장소 없는 장소와 리드미컬한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상징적 질서이전에 존재하는 상상적 혹은 실제 질서에 가까운 것이며, 주체가 아니라 주체가 측정 가능한 신체로 구성되는 과정 그 자체를 드러낸다. 경계 없는 육체들이 상징적 통합들을 끝없이 위협하는 출몰하는 염성순의 작품에서 코라적 존재는 크리스테바가 모구조(maternal organization)의 기호적(semiotic) 과정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가깝다. 이 과정들이 생생한 사실성(facticity)을 작동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염성순의 작품에서 단순히 허구나 환상이 아니라, 근원적인 경험의 실재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표현하기 힘든 한계경험은 신성함이자 비천함(abjection)이고, 신비이자 공포이며, 매혹이자 끔찍함이며, 숭고함이자 경멸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에서 여성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남성과 반대 위치에 있는 한 항목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고도 여성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러나 굳이 분류하자면 여성과 가까운 모성이다. 모성은 타자를 잉태하고 아낌없이 준다. 건물이나 좌표가 분명하게 연상되는 기하적 구조물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염성순은 바닥을 모호하게 처리한다. 명확한 기저 면을 알 수 없는 이 심연 속에서 존재로 가정된 모호한 실체들은 방황한다. 때로 그것은 여행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한 사라짐에 가깝다. 방황이나 여행이 여의치 않을 때는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불태우며 스스로를 기체로 변모시킴으로서 차원의 이동, 또는 탈주를 감행한다.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여정 중의 사과들이나 고체에서 곧장 기체로 변모하는 사과는 ‘도착란 속에서 실종됨을 받아들이는 것’(카푸토)이다. 이 사라짐은 비극도 해피엔딩도 아니다.


 리처드 커니는 [신, 이방인, 괴물]에서 카푸토가 한쪽에 융합, 현전, 통합, 순환성, 총체성, 경제성, 동일성 같은 아버지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열거하고, 다른 한쪽엔 그가 명백히 선호하는 코라의 좀 더 어머니적인 시뮬라크르들simulacrum, 즉 우발적 무근거성과 무정부주의적 포기를 정렬시킨다고 인용한다. 통합과 본질, 현전 등과 대조되는 해체적 타자를 전면화 시키는 카푸토에게 코라는 ‘무한한 수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공간적 배치spacing'이다. 이러한 배치 속에서 선적 요소가 하는 역할은 역설적이다. 직선들은 명확한 좌표를 설정하기 보다는 바닥없는 심연과 간격을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프레임만 존재하는 취약한 이 공간은 결코 든든한 좌표계가 되어주지 못하며, 사과로 응집되는 원초적 실재를 결코 완전히 포획할 수 없다. 이 공간에 내재된 간극과 간격들은 ‘깊은 구멍이자 카오스’(데리다)이다. 리처드 커니는 초기 비잔틴 교회 안의 성모벽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인용한다. ‘담을 수 없는 것을 담는 그릇’. 염성순에게 회화는 바로 이 역설적인 그릇을 닮았다. 회화를 포함한 언어의 속성 자체가 그러하다. 세계의 원초적인 수용기이자 자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이 그릇은, 상징적 질서의 독단성과 황량한 폐허 같은 현실성 양극 사이에서 지칠 줄 모르는 밀고 당김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영토를 창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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