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전시서문, 평론

[최은동] 망각과 결핍

망각과 결핍

-미시적(微視的) 관점으로 세상보기

박李창식(그룹스폰치 대표)

저기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창가에 앉아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 본다. 봄비에 생기를 얻은 나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채도와 명도가 한층 보강된 듯 싱그럽고 넉넉하게 보인다. 나뭇가지마다 초록색 잎사귀들이 풍요롭게 자라나 있으며, 때로는 이파리보다 먼저 피어난 새하얀 꽃송이가 아름다웠다. 이처럼 나무에 피어난 꽃과 잎사귀에서 우리는 생명의 존귀함을 얻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생명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나무는 땅속에 감춰진 뿌리에 의존하면서 햇볕과 바람 그리고 빗방울로 생명을 이루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수백 수천 가지의 기분 좋은 무언가로 이루어진 환경 속에서 고고한 생명의 시간을 이어간다. 나는 빗속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존재의 기쁨에 한없이 요동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잦다. 그만큼 함께 한다는 것은 있음과 없음의 사실학(事實學)적 관계만이 아니라 기분 좋은 상상과 본질로 이어진 날줄과 씨줄의 관계처럼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무가 땅에 뿌리내림으로써 생명을 이어가듯 나 또한 땅 위에 함께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명 나눔의 기쁨으로 행복하다. 최은동의 [대지를 걷다] 작업을 보면서 이런 상상으로 기뻤다. 나무가 뿌리 내림만으로 생명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함으로써 그곳에 서 있기에 우리는 생명을 이야기할 수 있다. 기분 좋은 기운을 얻는 것도 생명의 노래를 스스로 부를 때 가능한 것이다.

최은동의 작업은 이런 생명의 노래를 통해 본질을 스스로 지워내고 아파한다. 결핍된 삶을 스스로 자초하여 결핍(缺乏)됨을 부정한다. 그리고 추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예술의 언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여기서 결핍(deficiency, 缺乏)과 망각(oblivion, 忘却)의 사전적 의미를 적어 보자. <결핍>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 다 써서 사라짐이라 하였고, <망각> 어떤 사실을 잊어버림이라 정의한다. 사람은 망각과 결핍을 태생처럼 달고 산다. 뇌의 구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런 사실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잊어버린다고 그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사실이 예기치 않게 사라지거나 잊어버리는 경험을 수없이 반복한다. 마치 그런 사실을 연습이라도 하듯, 그러기에 망각과 결핍은 의도하지 않은 기억과 욕구의 망실(亡失)이다.

작가는 이런 의도하지 않은 망각과 결핍을 자신의 작업으로 끌어들인다. 소중한 사람과 물건 그리고 색과 소리, 냄새까지도 작가가 의도한 본질 속으로 끌어들여 재구성하거나 없애버린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의도적으로 망각하게 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본질을 없애는 작업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무가 가진 속성을 재구성하여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냅니다.” 이런 사실은 결핍의 흔적에서 기인한다. 나무란 잎사귀와 꽃이 피어야만 나무의 본질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란 본디 나무 본연의 본질 즉 생명이라는 관계 맺음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결핍은 바로 나뭇가지와 잎사귀 꽃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가 가진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그런 본질을 의도적으로 지워내면서 작가 본연의 본질적 형상을 피어 낸다. 그런 본질적 형상 위에 생명이라는 공동의 원칙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인간 본연의 고독이 짙게 스며있다.

내 주변과 내 이웃 그리고 가족의 구성원 속에서 작가는 늘 존재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지워 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참여하고, 발언하고 싶어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주변인에 대한 마음을 작업 속에 담아내기 시작했어요, 예기치 못한 사실과 현실적 감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그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지워내면서 다시금 나를 뒤 돌아보고 내 주변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관심과 참여가 해답은 아니겠지요,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순수한 감정과 열정을 잃어버려요, 그것이 가장 아쉬워요, 그건 사회적 현상 속에 매몰되는 인간 본연의 실정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런 모든 사실을 애써 배제 시키거나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추억을 다시금 살펴보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작가 본연의 본질을 지워내는 것은 바로 잃었던 과거로의 회귀이자 인간 본능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인지 모른다.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사실을 감내하며, 이겨 내고 있는지 모른다. 시선 속에 매몰되고, 생각 속에 매몰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그런 사실을 망각시키거나 결핍을 의도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포화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지움>과 <살핌>을 수시로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더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그래서 중용(中庸)의 미덕을 잊고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일상의 그런 사건과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덜어낸다. 나누기보다는 철저히 배제 시킨다. 그리고 작가 자신의 거추장스러운 욕구와 욕망을 망각의 늪 속에 던져 버린다. 마치 본질을 숨기고 깊은 잠에 빠진 겨울나무처럼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수십, 수백 년 세월의 흔적인 나무껍질과 나이테 그리고 수분을 얻지 못해 말라 비틀어져 쩍쩍 갈라진 나무 틈이라는 본질의 양식 속에 작가의 근거 즉, 존재의 사유인 본질을 숨겨 두었다. 그리고 지켜보는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찾고 이해하라 청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나이가 든다. 세월이 그 본질을 익숙하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본질을 이어나가며 사유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가 11년 만에 찾아와 우리에게 전하는 ‘망각과 결핍’이란 화두는 부족함, 이전에 덜어냄을 의미며, 많기에 나누는 것이며,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덜어내니 인간 본연의 본질을 찾는 유목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바람 부는 대로 그 길 위에서 사유하는 그런 자유로운 길을 트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무의 나이테처럼 사유의 흔적을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작업을 선택하고 있다. 작가가 선택한 대상은 본질에 다가선 나무의 형상이지만 결코 나무가 아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색불이공이요 공불이색이라(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 수상행식 역부여시라(受想行識 亦復如是)’이란 말이 있다. 본디 <색>은 <보이는> 것 즉, <형상>이라는 거와 다름이 없고, 마찬가지로 <감각>이나 <사유>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기억>으로 남겨둔다든가 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라는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이를 두고 ‘공과 색은, 즉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진실의 양면이요, 눈이 양쪽에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앞뒤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니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이라 양분하게 되면 위태롭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죽지 않고 흙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 말했다.’ 작가는 이런 사상적 편견을 [자화상]이라는 작품으로 풀어냈다. 관념적 형상인 불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의 온화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해골이 박혀 있다. 이는 부처도 사람에 기인함을 각인시키는 절묘한 표현인데, 이를 두고 작가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해탈한 부처의 모습 속에 고뇌하고 있는 인간 본연의 본질을 절묘하게 표현해낸 역작이다. 그리고 고뇌하는 인간상을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은유적 형상으로 처절하게 표현한 [아픈 거인의 고민]은 피에타상이나 성모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습이 아닌 나약하고 못난 꼽추의 모습이다. 그리고 품에 안긴 아이를 통해 결핍된 현실을 감내하는 작가 자신의 각인된 순수한 기억들을 하나둘 풀어내고 있는데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은 또 다른 작업이 [예린]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유년의 세월은 결코 아름다운 추억만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상실과 아픔 그리고 소중한 기억들 모든 것은 나와 가족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과의 예기치 않은 <관계>와 <설득>이 공존하는,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딸아이 예린을 통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했는지 모른다. 이런 상실의 아픔을 표현한 또 다른 작업이 [인형의 눈물]이다. 이 작업은 어찌 보면 작가 자신일지 모른다. 세상은 삶의 윤리, 사회의식,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공존하는 그림자 속에서 환희와 고통이 함께 들고 나감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자책하고 아파한다. 흘려야 하는 것이 어찌 눈물뿐이겠는가?

최은동의 작업은 미시적 관점에서의 세상 보기다. 부드럽고 아프고 재미있으며, 삶의 포착할 수 없는 환상을 표현하려 애쓰지만 예측할 수 없이 빗나가는 현실과 관계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삶에서 결코 진실을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작업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대상을 통해 삶의 참모습을 어렴풋이 들여다보는 메타포(metaphor)적인 작업을 통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진정한 의미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값진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한다. 그리고 낯선 시선을 따스하게 감싸려 한다. 세상은 불확실성에 내재한 그늘이 있다. 자신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늘을 어느 날 인식하고 놀라 당황하는 그래서 세상 밖으로 내몰린 아픈 사람과 그리고 그늘의 크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와 의지만을 허황하게 키워나가는 무감각한 사람들. 작가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이번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저기 서 있는 나무를 보았는가?

봄비에 흠뻑 젖고 서 있는 저 나무를 통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작가 홈페이지 : http://www.choieundong.com/



최은동, 조각가 최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