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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차현주]




선남선녀들의 초상, 얼굴의 현상학과 가면의 정치학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차현주의 조각은 인간과 그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처음에 그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그러므로 사실상 보통사람들이 처해 있는 실존적 위기의식이며 자의식을 응축된 형태에 담아낸, 실존주의로 범주화할 만한 조각으로 현상한다. 마치 몸을 안쪽으로 싸안듯 유기적인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는 형태와 상대적으로 구상적 형식을 얻고 있는 섬세한 손의 표정이 결합된 조각이 케테 콜비츠의 목판화 속 인물을 연상시킨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머니, 실존적 인간과 피에타가 의미론적으로 상호 연동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사무쳐오는, 그런 조각이었다. 손의 표정이라고 했다. 유일하게 구상적 형식이며 섬세한 표현을 얻고 있는, 그래서 더 도드라져 보이고 강조돼 보이는, 손의 표정에 몸의 표정이 응축된 것이며, 손의 표정이 몸의 표정을 대신한 것이며, 가시적인 형식(손) 속에 비가시적인 형식(몸 혹은 몸의 상황)이 암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유독 손을 강조하고 손의 표정에 주목해서일까. 이후 작가의 조각은 트레이드마크랄 수 있는 손으로 변신한다. 비록 손(부분)은 몸(전체)으로부터 분리돼 나왔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의미론적으로 손은 여전히 몸에 연장돼 있다. 전작에서처럼 몸을 암시하고, 몸이 처해있는 상황논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 그럼에도 외관상 손 조각에서 손의 표정은 전작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마치 아기의 손을 연상시키고 부처의 손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고 보테로의 손을 보는 것 같은, 귀엽고 통통한 형태며 표정을 가지고 있다. 아기와 부처 그리고 보테로의 눈에 비친 세상이 그렇듯 세상과 그리고 자기와 화해한 것일까(보테로도 처음에는 사회비판적이고 실존적인 위기상황을 그렸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앙증맞은, 넉넉한, 너그러운, 만지고 싶은 손을 만들었다. 단단한 석재가 무색할 만큼 부드러운, 꼭 떠오를 것만 같은, 가벼운 공기를 머금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푼 손을 만들어놓았다. 그렇게 풍선처럼 빵빵한 손 조각은 자신과의 화해의 제스처였고, 세상에 주는 작가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또 한 번 변신한다. 이번에는 손 대신 얼굴이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의 얼굴을 매개로 만인보를 만들었다. 만인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이 기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비록 누군가를 특정한 것은 아니지만, 굳이 캐려들면 누군가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암시와 연상 작용을 향해 열린, 그런 초상들이다. 세세하게는 다르지만 생긴 꼴이 대동소이한 것을 생각하면 내가 될 수도 그리고 네가 될 수도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며 선남선녀들의 초상을 그려놓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 사람들은 크게 말하는 사람들, 먹는 사람들, 그리고 웃는 사람들로 분류된다. 각각 소통의 문제, 생육과 생식(아님 경제적)의 문제, 그리고 웃음이 갖는 사회학적 의미를 주제화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서 소통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형성에 기초적인 매개가 된다.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에 속한다. 그리고 웃음은, 작가의 경우에 특히 하회탈과 관련이 깊은데, 전통적인 계급사회(요즈음 버전으로 치자면 갑과 을의 관계)에 연유한 억압을 웃음으로 해소한다는 풍자와 해학의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웃음(유머와 위트)을 사람들 간의 서먹하고 껄끄러운 관계를 해소시켜주는 사회적 장치라고 봤는데,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이 분류를 통해 각각 소통의 문제, 생육의 문제, 그리고 갈등을 해소하면서 더불어 사는 문제라는, 절실하고도 시급한 문제의식을 주제화해놓고 있었다. 
재밌는 것은 먹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먹는 것이 저마다의 이해관계와 매칭된 것이 재미있다. 예수는 물고기를 먹고 있는데, 오병이어를 상징하고,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전언을 상징하고, 크리스천을 상징한다. 부처는 연꽃을 먹고 있는데, 세상을 상징하는 진창 혹은 뻘밭에서 핀 꽃을 상징하고, 해탈을 상징한다. 한민족의 선조인 환웅과 웅녀는 각각 마늘과 쑥을 먹고 있고(사람이 된다는 것의, 혹은 거듭난다는 것의, 혹은 삶의 쓰고 매운 맛?), 서양 사람들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는 각각 사과(지혜의 열매)를 먹고 있다. 그런데, 아담의 표정이 재밌다. 신이 질책하자, 사실은 이브가 꼬드겼는데, 라고 대드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주먹을 먹고(할 말 없음?), 애기를 먹고(인생유전?), 입에 뱀 꼬리를 물고 있다(뱀의 혀? 뱀의 말? 우로보로스의 뱀? 무한 순환하는 삶?). 그리고 하나의 머리에 4개의 얼굴을 가진 4면 초상이 희로애락을 상징하고, 인생유전을 상징하고, 삶의 다면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중인격 내지 다중인격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정수리에 올라타고 있는 양이 그 의미를 강화시켜준다. 양의 탈을 쓴 이리가 그렇듯 상황논리에 따라서 서로 다른 표정이며 얼굴을 보여주는 세태를 풍자한 것일 수 있다. 

근작에서 주목할 점으로, 작가는 유리조각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형을 만들고, 그 위에 유리판을 얹어 고열로 내려앉힌 조각이다. 유리판 안쪽에 얼굴이 새겨진, 유리판 안에 얼굴이 갇힌 조각이다. 이처럼 유리조각으로 재현된 얼굴 시리즈 작업은 의미심장하다. 주지하다시피 주체는 아이덴티티와 페르소나의 이중으로 분열된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며 사회가 욕망하는 주체, 네가 보고 싶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주체가 페르소나다. 그리고 알다시피 페르소나는 가면을 의미한다(작가의 작업은 가면 내지 가면성 내지 가면의 정치학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그 가면 뒤에 숨은 주체가 아이덴티티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나의 아이덴티티를 본 적이 없고, 무의식의 지층 속에 꼭꼭 숨겨진(억압된) 나머지 때론 나 자신에게마저 낯설다. 
그런데, 유리소재는 투명하다. 그래서 그렇게 꼭꼭 숨겨진 나의 민낯이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일 것도 같다. 그런데, 정작 불투명보다 더 오리무중이다.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재의 성질 탓에 이쪽에서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쪽에서 보면 저렇게 보인다. 도대체 표정을 읽을 수가 없고, 표정에 탑재된 의미를 붙잡을 수가 없다. 투명한데, 투명하지가 않다. 역설적이다. 숨기면서 드러내는, 보여주면서 숨기는 아이덴티티와 페르소나, 의식과 무의식, 나의 욕망과 너의 욕망이 숨바꼭질을 벌인다. 유리벽이라는 말이 있다. 보이는데, 정작 올라가지는 못하는 계급구조를 상징한다. 그처럼 네가 보이는데, 보일 것도 같은데, 정작 너에게 가닿을 수가 없다. 도무지 너의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다. 자크 라캉은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고 했다. 나는 나의 말 속에 들어있지 않다고도 했다. 의식과 동시에 무의식이 말을 한다고도 했다. 무슨 말인가. 잘 보면 보이고, 절실하면 가닿을 수도 있다. 
작가의 초상작업은 탈을 기본형으로 각색하고 변주한 것이지만, 그래서 얼굴의 전형성(골상학?)이며 표정의 전형성이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이지만, 그래서 어쩜 익명적 주체를 다룬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잘 보면 그 속에 알 만한 사람들의 초상이 숨겨져 있어서, 그 숨은 얼굴들을 발견해내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나와 너의 초상일 수도 있겠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며 선남선녀들의 초상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특히 유리작업은 투명과 불투명(소재의 면에서), 인격의 이중성 내지 다중성(의미론적인 측면에서)을 매개로 진정한 소통의 의미에 대해서 곱씹게 만든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의 인격이며 인성이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천의 표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이해관계 여하에 따라서 표정을 바꾸는 카멜레온 형 인간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이중으로 분열되고 다중으로 분열되는 인간의 본성 내지 본질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근작에서 채색조각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런 색깔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색깔은 인격의 본성이 밀어올린(인격의 본성이 색깔로 화해진) 것일 수도 있고, 때론 인격을 가장하고 치장하는 장식품일 수도 있다. 
하회탈과 가부키 그리고 광대의 얼굴(얼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호)과 같은 가면에서 민낯을 읽기는 어렵다. 어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님, 애초에 기호에서 민낯(기호의 의도된 의미가 아닌 진정성)을 읽겠다는 기획 자체가 도발이고 위반일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이 시대의 초상과 함께, 다르게는 어쩜 가면으로 굳어진 얼굴, 가면으로 대체된 얼굴, 웃는 가면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 표정을 잃어버린 얼굴, 얼굴 없는 얼굴을 풍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아주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갤러리이즈 3F
2015.06.03~06.09


작품보기 :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892014977526006.1073741880.740520916008747&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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