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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와인잔·와인병, 술 없이 예술이 되다

'김종영미술관 2015 오늘의 작가' 김지원
개인 조각전 '집적' 열어
와인잔·병 고열에 녹여 재해석한
유리조형작 50점 전시
27일부터 4월22일까지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볼수록 신기하다. 하나로 뒤엉켜 버린 와인잔들이 꽃잎처럼 어우러져 있다. 본래 모양은 잃어버렸지만 부드러운 자태는 더욱 요염해졌다. 청색 와인잔 탑은 아슬아슬하기까지 하다.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지만 흘러내린 모양은 제각각. 플라스틱도 아닌 깨지기 쉬운 유리로 어떻게 만들었을까. 감탄과 함께 궁금증이 인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27일부터 4월 22일까지 열리는 ‘2015 오늘의 작가 김지원 조각전 집적(集積)’은 김종영미술관이 올해 ‘오늘의 작가’로 선정한 김지원(53) 작가의 와인잔과 와인병으로 만든 유리조형작품 50여점을 볼 수 있는 자리다. 

◇2009년부터 와인잔 변형 작품으로 주목  

전시를 앞두고 미술관에서 만난 김 작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오늘의 작가’로 선정됐다”며 “몇 번이나 다시 확인을 했을 정도”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전시는 미술관 1층부터 3층을 모두 활용하는 대규모 개인전으로 꾸려졌다.  

김 작가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거나 이른바 미술계의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았다. 미대를 졸업하고 서양화가를 꿈꿨지만 20대 초반 결혼해 서른 중반까지 남편의 내조와 육아에 힘썼다. 마흔 무렵 다시 미대에 입학해 조각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전업작가로 묵묵히 자신의 독창적인 조형작품을 만드는 데만 매진해 왔다. 

유리조형작품 이전에 돌조각과 철조각을 했던 김 작가는 2009년쯤 와인을 마시다가 문득 와인잔이 가진 조형미에 눈길이 갔다. 기성품임에도 유려한 선과 기능적인 디자인이 ‘예술작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 예술이 될 수는 없었다. 김 작가는 “당시에 ‘와인잔을 겹쳐 녹이면 어떤 조형품이 나올까’ 불현듯 궁금해져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유리를 녹일 수 있는 가마를 구할 수 없어 유리공방에 가서 의도를 설명했지만 바라던 형태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유리관련 전문서적을 보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

와인잔·와인병, 술 없이 예술이 되다
와인잔을 녹여 붙여 제작한 김지원 작가의 ‘합일기 2013-17’(사진=김종영미술관)


◇“우연이 만든 예술이 작품의 매력”  

김 작가는 “전기가마에 와인잔을 차곡차곡 쌓거나 둥글게 모아 섭씨 650도에서 700도 사이에서 녹여서 작품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슬럼핑 기법’이다. 하지만 “쌓는 방법이나 잔들이 깨지지 않고 녹는 온도를 알기 위해 숱하게 시행착오를 겪었다”며 쉽지 않았던 작업과정도 털어놨다. 전기가마에서 작품으로 완성된 와인잔은 10%도 안 된다. 전기가마는 한국전력에 각서까지 쓰고 작업실에 설치했다. 그렇게 만든 작품들로 2012년 8월 서울 종로구 송현동 57th갤러리에서 개인전 ‘합일기’ 전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와인잔 작가’란 별칭이 생겼다. “그때 전시를 둘러본 한 원로 조각가가 외국에서 공부를 했느냐고 물어서 의아했다. 나중에서야 ‘그만큼 한국에서 보기 힘든 유형’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알고 무척 기뻤다.” 

이번 전시에서 김 작가는 ‘합일기’ 시리즈 외에 와인병을 활용한 ‘집적’ 시리즈를 새롭게 선보인다. 김 작가는 새로운 연작에 대해 “수십개의 와인병을 마치 돌탑 쌓듯 쌓아올려 높은 온도에서 변형을 유도했다”며 “손으로 일부러 만들 수 없는 우연히 형성되는 조형적인 선이 작품의 매력이다”라고 전했다.  

와인잔·와인병, 술 없이 예술이 되다
김지원 작가의 ‘합일기 2014-7’. 파란 와인잔을 전기가마에 넣고 녹이는 슬럼핑 기법으로 만들었다(사진=김종영미술관).


◇작가 느낌 진솔하게 드러내는 작업 인상적 

김 작가가 김종영미술관의 ‘오늘의 작가’로 선정된 이유로는 와인잔·와인병 작업을 통해 조형예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를 다시금 환기시켜 주었다는 점이 꼽혔다. 미술관의 박춘호 학예사는 “관념으로 과대 포장하고, 과시적인 작업이 넘쳐나고 있는 최근의 조형예술계에서 작가의 느낌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작업이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오늘의 작가’로 선정된 만큼 앞으로의 포부가 예사롭지 않을 듯했다. 김 작가는 다소 들떴던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 “명예로운 전시를 할 수 있어 고마운 마음이다. 열심히 연구하고 창작에 매진하라는 격려로 알겠다. 무엇보다 예술가로서 신선하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와인잔·와인병, 술 없이 예술이 되다
김종영미술관의 ‘2015 오늘의 작가’ 선정자인 김지원 작가가 자신의 ‘합일기’ 시리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사진=방인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