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기사스크랩

[그림 읽어주는 남자] 박승모의 ‘마야’

[그림 읽어주는 남자] 박승모의 ‘마야’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해요



출처 : 경기일보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825592




그려야 하는 것과 만드는 것의 차이를 ‘그림’과 ‘조각’에서 찾지요. 평면과 입체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꼭이 둘이 다른 것만은 아녜요.

이 작품을 보세요. 그림일까요, 조각일까요? 박승모 작가의 작품을 언뜻 보면 그림 같지만 사실은 조각이기도 해요. 철망을 여러 겹 이어야만 저 그림 속 형상이 드러나거든요. 평면과 입체의 절묘한 조화죠.

드러남의 조화! 그래요. 그의 작품은 우물에 상이 어리듯 혹은 안개가 걷히면서 상이 뚜렷해지듯이 하나하나의 철망이 겹을 이룰 때 비로소 형상이 드러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형(形)의 현현(顯現)’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어떤 형상의 본래 모습이 지극한 현실로 드러난 것이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도대체 그 ‘어떤 형상’이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우리에게 ‘마야’라는 말을 힌트로 주고 있네요. 아시겠지만 마야라는 말은 흔히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알려져 있지요. 저는 아마도 그 마야부인에서 마야라는 이름의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렇다고 신라 진평왕의 왕비였던 마야부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것은 하나의 상징어일 테니, 고타나 싯다르타의 어머니에게서 왔을 게 분명합니다. 석가족(釋迦族)의 위대한 성자 석가모니를 낳은 마야부인 말예요. 부인은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無憂樹)아래에서 석가를 낳았지요.

신화에 따르면 석가는 도솔천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에게 흰 코끼리로 현몽해서 태내로 들어갔고,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았을 때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탄생했다고 해요. 부인은 석가가 태어나고 7일 만에 돌아가셨죠. 자, 그런데 왜 작가는 이 마야부인을 우리 앞에 현현하게 했을까요? 그녀가 지금 이곳에 지극한 현실로 드러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승모 작가의 ‘마야’는 그 옛날의 인도여성이거나 무언가 신비한 여인의 자태도 아니에요. 저 여인은 우리시대의 한국여성일 뿐예요. 젊고 아리따운 한국의 어머니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도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기도하는 모습과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게도 합니다만, 분명 저 얼굴이 우리 삶 속의 한 여성이며 어머니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서른다섯에 크게 깨닫고 여든에 입적할 때까지 고통에 처한 우리에게 스스로 등불이 되라고 외쳤지요. 석가모니는 부처가 되었고 사람들 속에서 어울렸어요. 그 삶은 예수의 삶에서도 고스란했지요. 기도하는 마야, 기도하는 어머니. 아픈 세월을 건너고 있는 지금 우리는 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해요. 아기장수 미륵불의 탄생과 함께 말예요!

김종길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