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의 벽에 창문을 내고자 한다
박상희
손을 모으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그래서인지 교회나 법당에선 내가 착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기도하던 손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면 어느새 나는 초식성에서 육식성으로 바뀌는 듯한 정서적 변이를 느낀다.
손을 합장하듯 모을 때와 주먹을 쥘 때의 나는 그대로 인데, 왜 손의 형태에 따라서 부드럽던 마음이 결의에 찬 투사로 전이 되고 고요하던 마음의 질감이 거칠게 바뀌는 것일까? 이것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계층의 여러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한다.
그런 가운데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세상을 보는 가치가 다를 때 서로 대립하며 파벌을 이룬다. 악수하던 손은 주먹이 되고 그 주먹들이 집단의 힘을 빌려 폭력이 되고 탄압과 독재가 되기도 한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은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부터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위협받을 때 저항한다.
심장의 피가 역류하듯 요동치며 어느새 전사가 된다.
투쟁은 인류 역사의 시작이었고 인류 역사가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의 욕망과 집단의 영역을 넓히고자 전쟁을 했다.
민족과 민족 간의 대립이 전쟁을 불러왔고, 이념과 이념의 마찰이 또한 그러했다.
인류의 역사는 반목과 투쟁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고, 이슬람교와 기독교간의 충돌, 알렉산더의 동방 정복 등 문명과 문명이 부딪히고 침략과 정복의 부침을 통한 엄청난 희생이 역설적이게도 헬레니즘과 같은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동력이 되었다.
세상은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계속 분화하고 진화(?)한다. 종교는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절대적 영향을 갖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신의 이름 아래 포용과 사랑보다는 광기와 맹신으로 살인과 희생을 미화하고 순교를 강요하지 않는가? 그리고 아직도 많은 국가는 애국과 혁명의 이름으로 폭정과 억압을 얼마나 정당화 하고 있는가?
나의 예술은 그러한 성역화 된 금기의 벽에 창문을 내고 그 안에 산소가 되기를 희망하며
그 창문을 통하여 또 다른 풍경이 보이기를 원한다. 두텁게 덧칠해진 위선의 가면에 새로운 표정을 그리고 싶다.
그것이 또 하나의 거짓된 페르소나가 될지라도 모순된 시대를 살아가는 이 모순된 예술가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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