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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전시서문, 평론

[이원석]이원석의 우화조각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들

이원석의 우화조각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들

최태만/미술평론가

이원석의 작품에는 인간을 대신하여 개와 돼지가 등장한다. 그의 작품이 단순히 동물의 형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의인화된 동물을 통해 심각한 사회비판적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화조각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솝우화에서 볼 수 있듯이 교훈적, 풍자적인 내용을 동식물 등에 빗대어 엮은 이야기를 우화라고 한다. 우화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이원석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특징으로 변형, 왜곡, 비약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 설득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보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인이기도 한다. 해학적이면서 반어적(ironic)인 그의 작품은 모두 그가 보고 느끼는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에 대한 풍자이자 비판이며 풍유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기둥을 이루고 있는 다섯마리의 동물이다. 이 기둥은 한옥을 개조한 전시공간의 조건을 고려하여 들보의 높이에 맞춰 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둥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마리의 동물이 취하고 있는 자세이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에도 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패가 있는 닛코의 도쇼궁에 있는 세 마리의 원숭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우화적인 조각의 기원은 공자의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어의 「안연」편 첫 장에서 공자는 인에 대해 묻는 제자 안연에게 이르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도 말라"라고 했던 것이다. 에도시대가 군사정권에 의해 장악되던 시대이기는 했지만 유학을 통치이념의 하나로 채택한 결과 도쇼궁의 세 원숭이를 통해 공자의 가르침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원석의 작품은 그것을 전복시키고 있다. 그에게 기둥은 건물을 지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 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축이자 이데올로기 그 자체 이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있어서 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물은 삿된 것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유지를 위해 진실을 가리는 통제와 검열의 장치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기둥을 이루고 있는 동물들은 아무것도 보지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파시스트적 명령체계에 길들여진 우중을 나타낸다. 또한 유치하게 칠해진 금색은 지켜야 할 규율의 허구를 암시한다. 게다가 공자는 예가 아니면 행하지도 말라고 했지만 그의 작품에서 그것은 아예 배제되고 있다. 즉 세 동물은 각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행동을 취하고 있으나 그것은 강요된 것일 뿐 '주체적 실천'이 자리할 공간은 없다.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개도 아니고 돼지도 아닌, 종이 다른 두 동물이 혼성된 기이한 현상이다. 돌연변이나 유전자조작이 아니고선 볼 수 없는 이 이종교배의 생명체는 태어나서는 안 될 재앙이다. 그 불길함을 조장하는 것이 기둥을 돌고 있는 오토바이, 즉 사이트카이다. 전쟁영화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이 사이드카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를 상징하는 정찰용 혹은 지휘관의 이동수단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오토바이를 몰로 있는 사람이나 그 옆에 탑승한 사람 모두 개와 돼지의 모습을 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나치를 지시한다기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혜, 파괴, 말살하는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권력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붉은 색과 푸른색 빛을 반복적으로 점멸하고 있는 헤드라이트 불빛 역시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 그러고 보니 이원석의 이 작품과 연관하여 떠오르는 작품으로 그로츠(Georg Grozs)가 1926년에 그린 <사회의 기둥들>이 떠오른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한 후 독일에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서자 거리는 좌파와 우파의 각축장이 되었고, 정부는 무능했으며 그 틈을 이용해 나치가 급속하게 성장했다. 그로츠의 눈에 비친 사법부, 언론, 의회, 교회, 군부 등 독일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세력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 아니라 독일을 망치고 있는 주범들이었으므로 신즉물적 방식을 동원해 그들의 위신을 통렬하게 풍자했던 것이다. 이원석의 작품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는 사내는 용감하지만 우둔하고 신사복을 잘 차려입은 사내는 교활하지만 비겁해보인다. 어쨎든 이들 모두 동물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본모습을 숨긴 채 기둥 주변을 반복적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들은 언제 멈출 것인가. 아마 파국적 대단원을 맞이하지 않는 한 이들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원석은 하필이면 왜 개와 돼지의 형상을 빌어왔을까. 그에게 있어서 돼지는 포식, 개는 충성을 상징한다. 인간에게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돼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돼지는 「서유기」의 저팔계처럼 무모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지닌 폭식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폭식은 또한 식탐이나 탐욕과도 연관된다. 반면에 뒤러(Albrecht Dürer)의 목판화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진군하고 있는 기사를 따르는 개가 '충직한 종'을 상징하듯 개는 미술에서 선량하고 책임감 강한 애완동물로 묘사되곤 했으나 이원석의 작품에서는 주구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영혼이 없는 추종'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 두 열성들의 교배에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개의 엉덩이에 올라타 교미하고 있는 돼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는 이 동물들의 번들거리는 분홍빛 피부는 에로틱한 분위기를 한 껏 고양시키는 한편 그들이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연상작용은 한 단계 더 비약의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켐프 데이비드에서 서로 포용하고 있는 장면이 실린 보도사진을 보고 이 작품을 착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선물로 건넨 미국산 쇠고기의 전면 수입개방이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자 부시는 한국방문을 취소하였다. 그러자 워싱턴포스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이라크전쟁에서 부시와 호흡을 맞춘 토니블레어 전 영국총리를 대신한 강력한 '경쟁자(contender)'라고 비꼬았다. 워싱턴포스트는 블레어에게 '부시의 공식적 강아지(official Bush lap dog)', 고이즈미 전 일본수상에게도 '아시아의 푸들'이란 별명을 붙여준 바 있다. 아무리 농담이라 하더라도 외국의 언론이, 그것도 국제적 영향력이 큰 언론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의 기자가 아무 생각 없이 농을 하듯 기사를 작성했을리 만무하다. 서로 포옹하고 있으나 그 흡족한 웃음 뒤에 감추어진 정치적 계산과 거래를 포착한 작가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이종교배'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번들거리는 고깃덩어리는 그 어색한 결합이 낳은 부산물이자 잉여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잉여는 행복하게 누워있는 어미돼지의 젖을 빨고 있는 새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순백의 돼지가족은 옛날 이발소에나 걸려있었음직한 그림 속의 이미지, 즉 '가화만사성'이란 한자와 함께 등장하는 행복의 표상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불행하게도 이 새끼들은 개도 돼지도 아닌 잡종이다. 붉고 푸른 원색으로 장식한 이 점박이들이 필사적으로 어미젖을 찾아 달려들고 있을 때 못된 새끼 한 마리는 입에 뼈다귀 대신 권총을 물고 관중들을 노려보고 있다. 그 앞에서 사나운 검은 개 한마리가 이들의 평화로운 섭생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무심하게 경호를 서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무시무시한 검은 개는 개도 돼지도 아닌 점박이들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추측일 뿐이지만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종교배 자체가 현실에 빗댄 우화이듯 검은 개의 새끼라고 해서 흰색으로 태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패러독스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원석이 한국사회를 바라로는 시선은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축구조물 위에 올려놓은 포클레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는 청계천복원에 자신을 얻은 현정부가 대운하로부터 4대강사업에 이르는 토목공사에 쏟아 부은 열정과 밀어붙이기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담겨있다. 높게 쌓아올린 탑 위에서 쉼 없이 작동하고 있는 포클레인은 권력과 자본의 결탁에 의해 시행되는 사업의 무모하고 중단을 모르는 저돌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탑은 지상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지하에 은폐된 시설물임을 암시하는 것이 천장에 설치한 영상물이다. 도로와 보도 사이의 빗물받이 하수도 뚜껑 속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행인들을 촬영한 그 동영상의 마지막 부분은 작가 자신이 뚜껑 아래 감춰진 비밀스러운 시설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막대기로 헤집다 화가 난 듯 그 쇠붙이 막대기를 집어던지고 사라지는 장면으로 구성돼 있다. 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하세계에 대한 음흉한 음로나 계략을 획책하고 있는 비밀스런 시설물이 존재한다는 가설로부터 출발한 이 동영상은 대형 토목사업이 사업가의 잉여이윤만 충족시킬 뿐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배제되거나 소회될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지하세계에 세운 바벨탑과도 같은 구조물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 인간성을 고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작인데다 오랫동안 작업과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원석이 탁월한 재능을 지닌 조각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비평가인 나로서는 우화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한국사회에 대해 비판적 메세지를 담고 있는 그의 작품이 지닌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보다 리얼리즘적 창작방법론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의 작품은 지나치게 은유적으로 비쳐질 것이며, 이미 익숙한 비유나 상징을 구사하고 있으므로, 그 너머의 복잡한 사회현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제한적이라는 것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를 모티브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에는 구체적으로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도 문제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권혁의 과잉과 정치적 결탁이란 문제에 대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문제의식을 조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플라스틱으로 만든 키치의 공화국이자 가설무대와도 같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그가 '문명시대의 야만'이란 무겁고 심각한 주제에 대해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데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원석, 조각가 이원석